나의 남편은 전형적인 공대생이다. 1을 입력하면 1이 나오지만, 아무것도 입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나온다.
누군가는 "그럼 시키면 되자나~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게 어디야?" 라고 하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속 모르는 소리다.
예를 들어,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같은 마음을 내비치거나,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것들은 입력으로 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임신 25주차의 배불뚝이 임산부이다.
들쑥 날쑥한 호르몬이 내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하고, 갑자기 먹고 싶은 것이 생기기도 한다.
사실 나는 특별한 입덧도 없었기에 특별히 먹고싶은 것도 없었고, 임신 전부터 싸오던 남편 도시락을 아직까지 싸고 있다. 생고기 손질도, 냉장고 정리 후 요리하는 것도 여전히 100% 내 몫이다.
어젯밤에는 저녁을 먹고 난 후였는데도 불구하고 라면이나 과자같은 간식거리가 먹고 싶었다.
"여보여보!! 나 오랜만에 진짜 라면이나 과자 같은게 먹고싶다~~ 컵라면도 먹고 싶고, 몽쉘같은것도 먹고싶어~ 진짜 너무너무 먹고 싶은 기분이 들엉!!"
이것은 입력이 아닌건가? 내가 기대한 말은 "오, 뭐가 먹고 싶어? 사다줄까?" 혹은 "같이 사러갈까~"였다.
하지만 남편의 출력은 달랐다.
"그런거 먹으면 몸에 해로워"
이 말을 끝으로 남편은 욕실로 씻으러 들어갔고, 약 30-40분 후 샤워를 마친 남편이 나왔을 때는 이미 내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뭐랄까, 서운함과 서글픔의 사이 정도랄까..
무표정해진 내 표정🙁을 눈치챈 남편이, 그제서야 라면 사러 갈까? 라고 물었다.
이젠 늦었지. 난 이미 라면을 먹을 기분이 아닌걸. 애써 마음을 진정시켜보지만 서운함이 자꾸만 고개를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괜히 미워진다.
아침이 되고도 이상하게 기분이 안좋았다.
나는 항상 남편이 뭘 먹고 싶어하는지, 뭘 하고 싶어하는지 신경쓰고 애써주려고 하는데, 어째서 남편은 내가 뭘 하고싶어하는지에 대해서 알고싶어 하지 않는 것 같지?
이런 말을 하면 남편이 하는 말은 정해져 있다.
"내가 언제 항상 그랬어?"
"얼굴 표정으로 화내지 말고, 차라리 말을 해~ 먹고싶은게 있으면 시켜~"
아니 뭘 얼마나 더 구체적으로 시켜야 한단 말인가? 정말 내가 라면이나 몽쉘이 너무너무 먹고싶고, 그걸 먹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으면 내가 뛰쳐나갔을 거다. 근데 그 상황은, 물리적으로 먹는 행위 말고 임신한 아내의 투정을 들어주는 남편의 행동이 필요했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점심 시간이 가까워졌다.
오늘은 남편과 내가 둘다 집에 있는 날이다. 역시 내가 움직이지 않으니까 아무도 점심을 준비하지 않는다. 나는 배고프지도 않았다. 평소에는 배가 고프지 않아도 남편의 점심 준비를 부지런히 해서 대령하겠지만, 오늘은 정말 손하나 꿈쩍하기 싫었다.
왜 나는 매번 나의 일을 멈추고 남편의 점심 메뉴를 고민하고, 요리를 해야하는가? (참고로 남편은 학생이고, 나는 재택근무자이다)
12시가 가까워오자 남편이 묻는다.
"배고프지 않아?"
"난 안고픈데?(이 말은 점심메뉴를 고민하는 내게, 남편이 내게 자주하는 말이다)"
오늘은 정말, 너의 배고픔도, 점심 메뉴도 결정해서 음식을 대령하는게 싫구나.
한 30분 동안 내 눈치를 보던 남편이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어디가냐고 물었더니, 라면을 사러 간단다.
라면?? 지금???
너가 어제 먹고싶다며
나 지금은 안먹고 싶어.
이따가 먹고싶을 수도 있어
하아.
냉장고 속 재료를 이용해서 점심 메뉴를 만들어먹을 수도 있는데, 굳이. 보란듯이. 라면을 사러 나간다.
어디서 라면을 사오라는 입력이 먹혔는지 모르겠다. 넣지도 않은 입력은 '어젯밤에 안사다준 라면으로 인해 기분이 상해서, 점심밥을 안해주는 아내'라는 출력을 만들어냈고, 남편은 기어이 라면을 사러 나갔다.
여전히 내 서운함은 풀리지 않고 있다.
내가 원한게 정말 그 컵라면이었을까?
"서운한 건 말하고 차라리 기분이 상하기 전에 자기한테 제대로 시키라"는 말을 듣기 싫으니 남편에게 입을 다물게 된다.
저 말은 나를 더 서운하게 하기에..
오늘은 진짜 남편의 밥 생각따위 하고 싶지 않아서, 노트북과 일거리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기분이 별로인데, 하늘은 맑은 날이다.
'임신 중 필요한 정보 > 임신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신일기] 27주 임신중기 미국 산부인과 정기검진 _ 백일해주사, 임당검사 (0) | 2021.08.13 |
---|---|
[임신일기]_27주 1일차 _임신 변비 그리고 치질... 😫 (1) | 2021.08.09 |
[임신 24주] 임신 7개월차 일상의 임신기록 (0) | 2021.07.22 |
[임신23주] 임신으로 인해 달라지는 몸과 마음 (0) | 2021.07.14 |
22주 임산부 인천-보스턴 직항 / 대한항공 비지니스 이용 후기 (1) | 2021.07.11 |